읽으면서 무언가를 얻고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한 책이 있고, 정말 재미를 위해 읽는 책이 있다. 평소 소설을 읽을 때는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은 버리고,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에 빠져드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래서 김진명 작가의 『직지』를 읽을 때에도 무언가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가 한창 사내 포럼을 준비할 때라 그런지 IT 기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입사 초기부터 하고 있던 커리어적인 고민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입사 초기부터 나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IT 분야에서는 선행 기술을 다루는 자들을 고급 엔지니어로 대우하고, 비즈니스 영역에 적용하는 사람들은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다. 나 또한 처음 입사했을 때 선행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원들을 보며 동경하기도 하고, 오로지 핵심 기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럽기도 했다. 같은 IT 분야이긴 하지만, 비즈니스와 가까운 쪽에 서 있는 나는 갈수록 기술력에서는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직지』 읽으며 얻은 답은 각자의 역할이 있고, 이는 우월과 열등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외로 직지에 대한 세계의 반응은 냉담해요. 그래, 인정한다, 직지가 가장 오래됐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냐.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사실은 이미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럼에도 세상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역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에 주목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직지의 '우월'함을 인정해주지 않냐며 답답해했다. 독일인들은 '직지가 가장 오래된 건 맞지만 조야하기 짝이 없고 어디 절간에 처박혀 있었을 뿐 도대체 한 게 뭐냐?'며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비교 우위를 주장했다.
모든 문제는 '우월과 열등'이라는 '비교'의 프레임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사실 나도 금속활자를 비교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IT에서 선행 기술이 우월하다는 것처럼.
직지가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졌는지 안 전해졌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설혹 전해졌다 하더라도 구텐베르크의 위대함이나 인류 역사에서 그가 일으킨 지식혁명의 거대한 불꽃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습니다. 직지가 씨앗이라면 구텐베르크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 한 정원사입니다.
소설의 내용 중 김기연 기자는 직지를 씨앗으로, 구텐베르크를 정원사로 비유하며 직지의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는 한국인들과, 구텐베르크의 파급력을 주장하는 독일인들 모두에게 박수 갈채를 받는다.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두 가지 모두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각자의 역할이 달랐을 뿐이다.
IT 분야에서는 기술력이 최고로 인정 받기 때문에 선행 기술 엔지니어들의 대우는 매우 좋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씨앗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잘 가꾸어 꽃을 피우는 사람도 필요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내게 부족한 것에 집중하여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면 더 큰 성과, 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다.
내가 IT 분야로 뛰어든 이유는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닌, IT 기술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였다. 기술 그 자체도 분명 중요하지만, 결국 그 기술을 이용해 무엇을 하느냐가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직지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도 소수의 독점으로부터 지식을 해방시켜 온 인류가 손잡고 동행하자는 지식혁명이었다.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심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위대한 메시지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IT 기술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모든 기술의 결과물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딥 페이크'라는 영상 합성 기술은 많은 가짜 뉴스와 유명인들의 가짜 포르노를 생성해내고 있다.
어떤 씨앗을 만들어내고, 어떤 꽃을 피우는지는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이어령 선생님이 한 강연에서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인공지능을 '인공 지혜'(AW·Artificial Wisdom)로 변화시키는 사명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놓여 있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비교'의 프레임에 갇혀 나의 역할을 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의 힘과 영향력을 알고, 선한 정원사가 되기를 힘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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