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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록

『사랑의 기술』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건강하고도 만족스러운 해답

by Lazy Quant 2020.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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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오래 전부터 계속 가져왔던 기도 제목 중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런 기도 제목을 오랫동안 품어온 이유는 스스로가 그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위선적이고 부끄러운 모습이다. 항상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읽으면서 그저 내 마음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솟아나기를 바랐던 모습이 얼마나 무지한 태도였는지 알게 되었다. 사랑을 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생겨나기만을 바랐으니, 변화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01. 사랑의 대상 : 모든 사람

사랑은 근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태도'이며 '성격의 방향'이다. 만약 어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사랑이 참 어렵다'라고 말했지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을 잘 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장기간 연애'이다. 그토록 사랑이 어려운 나인데, 한 사람과 7년 이상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나의 연애를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공서적 애착' 또는 '확대된 이기주의'라고 말한다. 내가 오랜 시간동안 한 사람과 잘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상대방을 '나'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이기적인 나인데, 나라는 범위에 그 대상이 포함되니 잘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연인을 나처럼 여기고 소중히 대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 대상이 확대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그 대상은 나의 이웃,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되어야 한다. 사랑은 누군가와의 관계가 아닌 '살아가는 태도'이기 때문에 모두를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02. 사랑의 기술 : 객관화, 자기 희생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앞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사랑의 성취를 위한 중요한 조건은 '자아 도취의 극복'이다. (···만일 내가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을 갈구해야 하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해 민감해져야 한다. 나는 자아 도취적으로 왜곡된 어떤 사람과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 인상과, 나의 관심이나 욕구, 두려움 등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그 사람의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첫 번째 사랑의 기술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객관화이다. 모든 사람은 이기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자신의 관점으로 필터링해서 받아들인다. 나의 필터를 벗어버리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사랑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요즘 여러 사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모든 프로젝트원들이 바쁘기 때문에 공통된 업무에 대한 역할을 정하는 것에 민감하다. 그럴 때마다 아무래도 연차가 낮은 내가 공통된 업무를 맡게 될 때가 많다. 그들이 나에게 업무를 떠넘긴다고 느낀다. 그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요즘 회사 생활을 나의 필터로 바라본 모습이다. 반대로 다른 프로젝트원들의 필터로 이 상황을 바라본다면 정반대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다.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프로젝트로 인해 모두가 바쁘다. 프로젝트를 위해 공통된 업무를 누군가가 처리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이며,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사랑은 신념의 행위이며 누구든 신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

 여기서 자기 희생이라는 두 번째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자기 희생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해야하는 공통의 업무를 내가 맡아서 진행한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이익은 없다. 내 업무를 처리해야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손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이다.


03. 사랑의 이유 : 윈-윈(win-win)

비록 자본주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불일치나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구조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런 사랑이라면 굳이 하지 않을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신앙적인 가르침에 따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니까 애써 노력할 수는 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사랑이 손해라면 굳이 사랑하며 살아가야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저자 에리히 프롬조차 자본주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사랑을 실천하다보면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손해를 감수해야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부의 축적에 도움이 안 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본성을 잃어버리게 한 사회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해답을 정확히 제시하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한 책이 떠올랐다. 『기브앤테이크: 혁명적인 성공 비결』라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주는 Giver는 실패한다. 그러나 성공의 꼭대기에도 자기 희생을 실천하는 Giver가 있었다. 왜 그럴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다. Giver에게 성공이란 '남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개인적인 성취'였다. Giver는 다른 사람들을 밀어 떨어뜨리지 않고 파이를 키우는 동시에 모두에게 이로운 방법을 찾아내 정상에 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모두에게 이로운 방법을 찾아내 정상에 오른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사랑인데, 성공하기 위해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가를 바라는 모순이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도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며, 사랑은 신념의 행위"라고 말한다.

 

 사랑은 제로섬(Zero Sum) 게임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의 판을 논제로섬(Non-Zero Sum) 게임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건강하고도 만족스러운 해답"이다.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Give and Take(기브앤테이크):주는 사람이 성공한다, 생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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